2009/05/02 15:56 http://blog.naver.com/arpuer?Redirect=Log&logNo=100066268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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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1971.
요즈음 TV에서 양희은이란 인물을 접하는 젊은 대중들은 사실 양희은이란 인물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무섭고 한 힘 쓰는 아줌마로 컨셉이 잡힌 터라,
그녀가 70년대 벽두에 대한민국 포크계를 이끌었던 여성 포크 싱어란 사실은 잘 모를 것이란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녀의 요즈음 그런 모습도 결코 나쁘지 않다.
솔직하고 직선적인 모습은 젊은 시절 그녀가 발산하던 그 목소리의 향(香)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리고
환갑을 바라보는 세월의 무게로 인해 그녀의 하우징이 많이 달라졌지만,
자주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나에겐 즐거움이다.
그녀를 본 뒤엔 어김없이 그녀의 오래된 LP들이 턴테이블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달리기 때문이다.
"세월(歲月) 앞에 장사(將士) 없다"란 명언(名言)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양희은은 1952년 8월 13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고,
軍장교이었던 부친과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게 된다.
아무래도 그녀의 탁 트인 목청은 아빠의 군인정신(?)과 엄마의 탤런트를 물려받은 산물인 것 같다.
그리고, 유아기에 소아마비를 앓아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입이 약간 불편해 보이는 것이다.
70년대 우리네 동네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림이다.
아귀가 맞지않고 색깔은 벗겨진 오래된 저런 철대문이 집집마다 있었고,
그 앞으로는 저런 촌스런(^^) 옷을 입은 꼬마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노래'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듯 재능을 보였으며,
초등학교에서 경기女高에 이르기까지 교내에서 노래하면 그녀로 통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한다.
초등학교 시절을 가회동에서 보냈는데, 동생인 양희경과 함께 '양대령네 딸들'로 불리웠다고 한다.
참,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TV에서 동생 양희경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언니인 양희은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그녀는 성우 출신이었다.
양희은과 김민기
그녀의 노래 인생은대학입시에서 낙방한 후 재수를 하던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과 함께 구경간 명동의 '청개구리' 공연에서 우연히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서유석의 기타 반주에 맞춰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러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가 70년대 대한민국 포크계의 대부(大父)와 대모(大母)가 조우한 첫 만남인 셈이다.
이렇게 국내 포크의 산실인 '청개구리'와 안면을 튼 후 김민기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재수 끝에 서강대학교 사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계속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신입생 시절을 보내던 1971년 9월, 드디어 데뷔LP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한다.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아침이슬", 1971. 9. 유니버어살
70년대 청년문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앨범재킷이 멋진 데뷔 앨범이다.
긴 생머리, 청바지와 통기타...
김민기의 대표곡격인 "아침이슬", 함축적인 가사가 압권인 "그날",
역시 김민기와 같은 서울대생이었던 김광희의 "세노야"등의 창작곡과
언제 들어도 참 좋은 "Puff", "Seven Deffodils", "Try to Remember" 등의 번안곡이 실려있다.
"아침이슬"이 언제부터인가 데모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곡이 1973년엔 건전가요 리스트에 올랐다가 다음해엔 금지곡이 되었으니,
우리네 세상사 모든 일은 시각에 따라 다르고 해석에 따라 그 본질이 모두 다른 이치이리라.
" '71폭송 힛트모음 제1집 ", 1971. 9. 유니버살
양희은은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하면서 거의 동시에 포크송 옴니버스 앨범인 본작에
"나무잎이 떨어져서"와 불멸의 애청곡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리고 번안곡인 "일곱송이의 수선화" 등 세 곡을 올리고 있는데, 대중적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지명도를 확보한 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양희은은 앨범 발표로 대중들에 대한 인지도를 높혔고,
명동의 오비스 캐빈이나 코스모스 그룹 2층 파라다이스 룸 등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1970년대초 대한민국의 포크 열풍을선두에서이끄는 개척자 그룹에서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그녀는 순수한 포크族들의 모임인 '청개구리' 활동을 하면서도,
상업적인 활동, 즉 명동 오비스 캐빈이나 코스모스 등의 쌀롱가와 방송에 출연했던 것에 대해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집안 형편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것은 당시 순수한
노래 모임인 '청개구리'에서도 경희대의 김윤태, 서강대의 임문일, 그리고 김민기와 양희은 자신을
'사총사'라고 부르며 일체의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말자고 약속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술회한 부분인 것 같다.
부모의 이혼 및 어머니의 빚보증으로 가세가 기울어 그녀가 살림을 떠맡게 되었었다고 한다.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제2집", 1972. 7. 유니버어살
아쉽게도 음반은 초반을 가지고 있지만, 언젠가 앨범 커버가 증발해버린 레코드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 양희은의 음반인데,
김민기가 양희은이고, 양희은이 김민기인 듯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름다운 것들", "그 사이", "서울로 가는 길", "새벽길", "작은 연못"등도 좋치만,
난 "백구"를 제일로 좋아한다. 내 초등학교 시절 마당에 살던 우리 백구도 생각나고...
"불나무", 1972. 9. 성음
방의경의 "불나무"를 타이틀 곡으로 한, 일명 '봉투앨범' 앨범이다.
음반에 있는 다른 수록곡들은 이미 양희은이 발표한 곡들을 모아 놓았다.
"맷돌 밝은노래 모음", 1972.. 재발매 CD
양희은은 본 음반에서 "서울로 가는 길", 김광희 작곡의 "빈자리", 그리고
공연에 참여한 다른 포크 싱어들과 다함께 부른 "아침이슬" 이렇게 세 곡을 부르고 있다.
맷돌은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을 시작으로
계속 가졌던 공연의 이름이며, 이 음반은 같은해 9월 26일 명동 국립극장에서의 실황을 담은 것이다.
맷돌 공연에서 노래하는 양희은, 1972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제3집", 1973. 10. 유니버어살
정규 3집 앨범으로 볼 수 있는 음반으로, 1, 2집이
김민기의 냄새가 강하게 났던 반면 본작에서는 다양한 스팩트럼을 맛볼 수 있다.
조동진, 방의경, 한대수, 서유석, 김광희그리고, 신중현에 이르기까지
실로 당대 최고수들의 작품을 양희은이 맛나게 요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제3집", 카피음반
대학생 가수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1972년 가을엔
라디오에서 방송DJ를 맡는 등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을 하던
그녀에게도 대부분의 스타가 겪게 되는 시련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1973년초엔 서유석과의 결혼설, 74년엔 금지가요 파동 등에 휩쓸리면서....
70년대초 국내 포크 씬의 대부(大父)와 대모(大母)격인
서유석과 양희은 사이에 터져나온 열애설은 지금의 그 어떤 연예계 커플이
던져주는 폭탄못지않은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같은 씬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최고의 남녀 가수들이었고, 당시 젊은이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TBC-TV의 '오라 오라 오라'에서 두사람은 공동 MC를 맡았었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었든지 70년대초중반 두사람이 남긴 주옥같은 포크 송들은 별들의 향연이었다.
"내님의 사랑은/오너라 비야", 1974. 5. 유니버어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그녀의 "내님의 사랑은"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며,
故이주원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김정호와 김민기의 곡들로 이루어진 음반이다.
"내님의 사랑은", "오너라 비야", "그리움" 등 세 곡이 이주원의 작품들이다.
이주원(1976)
(註; 이주원은 70년대후반 '따로또같이'의 멤버이었으며 국내 포크史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Greatest Hits", 1974. 6. 카피음반
서유석, 임창제, 양희은, 이수영 그리고 뒷편에 송창식 등 한시대를 풍미했던 포크 싱어들이다.
임창제 앞의 스탠딩 마이크에 TBC라고 하는 추억의(?) 방송국 마크가 보이는데,
원래 삼성 소유였던 방송국이었지만 서슬 시퍼런 5공 군사정권 시절에 강제로 통폐합되었다.
아마 후라이 보이 곽규석의 '쇼 쇼 쇼'하면 생각나는 분들 많으실테고, 70년대말
캠퍼스 그룹사운드의 황금기를 열었던 '해변가요제'와 '젊은이의 가요제'를 주최했던 방송국이기도 하다.
71년 데뷔 이후 73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군사정권의
칼날이 날아들어 수많은 그녀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여버려 실질적으로 활동 중지에 들어간다.
그녀의 노래들 중 "아침이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 30여곡 이상이 금지곡이 되었으니까.
군사 독재 시절엔 족쇄를 채우면 채울수로 오히려 가멸찬 반항 운동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 시점의 '양희은'이란 포크 싱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동권 가수로 만든 면도 있다.
"보고싶은 마음/밤은 가고/빗속을 둘이서", 1975. 6. 유니버어살
故김정호의 "보고싶은 마음", "빗속을 둘이서" 등이 슬픔을 안겨주기도 하고,
이수만 작곡의 "누가 알게 될까" 같은 곡에서는 제법 락킹한 맛을 풍기며,
김광희가 만든 "나의 친구"에선 다시 순수한 포크 싱어로 돌아간다.
"나의 친구"는 1974년 11월 공개된 '현경과 영애'의 유일작에 "내친구"로 발표되었던 곡이다.
"네꿈을펼쳐라/내곁에와요", 1976. 2. 서라벌
이주원이 만든 "네꿈을 펼쳐라", "내곁에 와요" 등이 많이 듣던 넘버들이고,
"하늘", "노래"등 네 곡의 이정선 작품들을 양희은이 불러주고 있다.
"한사람/세월이가면", 1976. 4. 서라벌
양희은의 초기는 김민기와, 중기는 이주원이란 인물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본 음반에서도 이주원이 만든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한사람", "모두 모여 노래를",
"그리운 그님네는", "나홀로", "내사랑 그대곁에", 이렇게 다섯 곡이 이주원의 작품이다.
"내님의 사랑은", 1976. 8. 서라벌
이주원의 "내님의 사랑은" 외엔 이전의 힛트곡들을 수록한 베스트 음반 성격이다.
"여고동창생", 1976. 11. 서라벌
대단히 만족스러운 당대의 포크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양희은은 "여고동창생"과 "그리움" 두 곡을 부르고 있으며,
이주원의 "나홀로"를 포함하여 바블껌, 허림, 박인희, 쉐그린 등의 노래가 실려있다.
"양희은 Best", 1977. 5. 서라벌
"들길 따라서"를 필두로 양희은, 이주원 콤비의 넘버들과 찬송가들을 부르고 있다.
재미있는건 이 음반을 들을 때면 특히 남궁옥분과 양희은의 음색이 꽤 헷갈린다는 것이다.^^
"거치른들판에푸르른솔잎처럼/천릿길"(초반), 1979. 1. 서라벌
3년 만에 발표한 양희은의 독집앨범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음반이다.
軍에서 제대한 김민기가 다시 양희은과 손을 잡고 발표한 본작에서 정작 김민기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는데, '김아영'이란 이름이 그가 사용한 대명(代名)이었기 때문이다.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은 "아침이슬"과 더불어 양대(兩大) 데모가가 아니었을까?
국악을 도입한 "밤뱃놀이", 눈에 보이는가삿말과 천연덕한 양희은의 목소리가 일품인
"고무줄 놀이", 군복을 입어본 청춘들이면누구나 공감할 "늙은 군인의 노래", 마치 진군가
같은 리듬에 역시 가삿말이 압권인 "천릿길", 가족들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식구생각" 등이 좋다.
초반은 앞면 네 번째 트랙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고,
재반은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수록곡이 바뀌어져 있다. 70년대말과 80년대초에 대학시절을
보낸 청춘들이라면 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캠퍼스에서 안불러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새우깡에 병맥주나 소주를 사들고 캠퍼스 잔디밭에서 부르던 노래들 중 단골이었으며,
"영자야 내딸년아 몸 성히성히 잘 있느냐?......................."와 함께 셋트로 부르던 곡이기도 하다.
"거치른들판에푸르른솔잎처럼/천릿길"(재반), 1979. 1. 서라벌
초반과 재반은 재킷 뒷면도 이렇게 다른데, 초반이 우울한 시대상을
차분하게 읊조리는 듯한 사진이라면 재반은 너무나 밝게 웃는 양희은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70년대중반부터 수많은 그녀의 노래들이 금지곡에 묶여 실질적인
가수 활동을 할 수 없던 차에, 1977년엔 라디오 방송에서 권유 하차하고,
1978년 TV 쇼 프로그램에서마지막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양희은.
당연히 정권의 압력에 의해 일체의 방송 출연 등이 불가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운동권의 기수(?)'가 대중들을 상대로 한 방송 출연을 그대로 두었을 리는 만무하지.
아뭏튼 이후로 5년 동안 그녀를 방송에서 볼 수가 없었다.
8년 만의 늦깍이 대학 졸업과 봉제 업체에서의 직장 생활, 그리고 암 수술과 투병생활 등의 이유로.
하지만, 80년대초의 해빙 무드와 그녀의 노래에 대한 강한 열망은 다시 그녀를 노래판으로 불러들였다.
1983년, 자신이 가사를 쓴 "하얀 목련"으로 오랜 공백을 깨고 대중들 앞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잠시 1973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신중현과 양희은, 1973
어딘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중현과 양희은이 만나 1973년 앨범을 발표한다.
신중현은 같은해에 서유석과도 같이 작업을 하여 '선녀/나는 너를' 앨범을 공개하였는데,
락을 추구하였던 신중현이 포크에도 유달리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음반은 1973년에 발표한 초반을 1980년에 편집을 하여 재발매한레코드이다.
"이름모를 소녀/길", 1980. 3. 서라벌
A면은 김정호의 곡들을, B면은 신중현의 곡들을 수록한 음반이다.
1973년에 발표된 초반의 경우 본작의 B면이 A면에 그대로 들어가 있고,
B면엔 조동진, 한대수, 서유석, 김광희가 만든 곡들을 양희은이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음반은 재반이라고 보기도 좀 그렇고, 편집 재반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신중현과 함께 작업한 싸이키 포크 "길","당신의 꿈" 등이 앨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길"이나 "고운 마음" 등에서 바람처럼흐르며 들리는 하프의 싸이키한 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같은해인 1973년에 공개된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女帝)' 김정미의 앨범 '바람'에도
"나도 몰래"와 "당신의 꿈"이 수록되어 있으니 비교 감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청음법이 될 것이다.
"어디만큼왔니/누구나다있지", 1981. 5. 서라벌
송창식의 곡인 "어디만큼 왔니"가 가장 귀에 익은 음반이다.
30대중반으로 접어든 그녀에게선 보통의 30대 여성들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깊이가 있다. 20대에 이미 최고의 자리와 수난을 경험했기에...
그래서, 난 그녀가 30대에 발표한 "하얀목련"과 "찔레꽃 피면" 같은 곡을 더 좋아했었다.
"이루어질수없는사랑", 1985. 1. 서라벌
데뷔시절부터 "하얀 목련"에 이르기까지 힛트곡들을 모은 베스트 음반이다.
"질레꽃피면", 1985. 9. 서라벌
라이너 노트를 읽어보면 이 음반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 지를 알 수 있고,
특히, 조동진 선배에 대한 고마움을 양희은은 표하고 있다.
하덕규의 "찔레꽃 피면"과 "한계령"은 말그대로 가슴을 후벼파고들며,
장제훈이 가사를 쓰고 조동진이 곡을 부친 "옛날에 옛날에"는 찡한 울림이 있다.
"양희은이처음부른노래들", 2LP. 1987. 10. 서라벌
두 장짜리 베스트 음반으로, 라이너 노트에 보면 양희은이 다시 부르면
더욱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스무살의 희은이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을 위해
옛것 그대로를 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오리지널을 그대로 올렸다고 한다.
1987년, 양희은은 재미교포와 결혼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1994년에다시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지만, 그 사이 사이에도 좋은 음반을 발표했는데,
아래의 "1991"은 이병우와 작업을 한 음반으로 후기작임에도 불구하고 명반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 1991 ", 1991. 킹레코드
데뷔음반을 발표한 지 20년, 이제 그녀의 나이 마흔이 되었다.
그래서 삶을 관조하면서 노래를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병우의 바램대로 이 음반을 들으면 마음에 편안함이 밀려온다.
"그해 겨울", "그리운 친구에게", "가을 아침", 저 바람은 어디서?", "11月 그저녁에",
"나무와 아이", "사랑-그 쓸쓸함에 대하여", "잠들기 바로전", 모든 곡이 만점 짜리이다.
그리고, 김의철이 시도했던 클래식 포크와 그 선이 닿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지난 세월은 자랑이 아니라
세월만큼 퇴직된 창피함이다.
이제야 진정 좋은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길 바란다."
- 일천구백팔십오년 섣달 스무날 양희은 -
데뷔LP를 발표한 지 14년 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그녀가 한 말이다.
양희은은 그 이전에도 최고의 가수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국내 최고의 가수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의 40년 전의 이 모습과 지금 '세바퀴' 등의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중인 양희은을 매칭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에서 그녀가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하면 워낙 목소리가 크고 특이하여
모두가 양희은이란 걸 알아채릴 정도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그런
대한민국의 보통(?)아주머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단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던 70년대초에서 전성기를 훨씬 지난
90년대까지도 난 그녀의 음악을 사랑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史에서 김민기란 인물을 빼놓을 수는 없다.
김민기란 절륜의 크리에이터가 있었고, 양희은이란 희대의 메신저가 양립함으로써,
70년대에 그들이 내놓은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이빛을 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떼를 쓰다시피 송창식에게 노래를
시켜달라고 했던 양희은이 벌써 쉰 여덟이 되었다. 그녀에게 그런 가난의 역사가
없어서, 아니면 우리들에게 운(運)이 없어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면..........
명성황후가 당당하게 "나는 조선(朝鮮)의 국모(國母)다."라고 했듯이,
양희은은"내가 대한민국 포크계의 대모(大母)다."라고 말해도 부정할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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