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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보트 피플과 한국인 선장, 뒷 얘기

iMozart 2009. 10. 11. 21:16

베트남 보트 피플과 한국인 선장, 뒷 얘기

그것은 단 한 줄의 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베트남 보트 피플 피터누엔씨가 대한적십자사 한완상 총재, 김영환 부산지사 회장, 진의장 통영시장과 이현희 대구서부경찰서장을 만나게 된 것은. 그리고 누엔씨와 그를 구조한 전제용선장의 감동적인 사연이 한국일보, 중앙일보, 서울경제신문 등 일간지와, 연합뉴스, 뉴시스, YTN과 여러 매체에 소개된 것은 월간지에 실린 기사의 짤막한 한 구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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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용 선장


2006년 9월 7일 인천공항, 전제용 선장 부부는 누엔 부부가 탄 비행기가 도착하기를 초초히 기다렸다. 미리 연락을 받은 동아일보, 중앙일보 기자도 함께 있었다. 이윽고 출국장을 빠져 나오는 피터누엔씨를 바라보는 전선장의 눈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2년 전 전선장이 누엔씨의 초청을 받고 LA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누엔씨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남자의 눈물은 말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2005년 초, 신동아 2005년 2월호에 게재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베트남 보트 피플 출신으로 미국에 살고 있는 누엔씨가 그와 동료 95명의 생명을 구조한 한국인 선장을 17년 동안 찾다가 마침내 그의 소재를 발견하고 미국으로 초청하여 19년 만에 감격적인 해후를 나눴다는 얘기였다.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모래에 새기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같이 삭막한 세상에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잊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던 필자는 이 얘기 속에 생명 존중 사상이자 적십자 인도주의 이념이 녹아있어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적십자에 대한 얘기도 담겨 있어 세상에 꼭 알리고 싶었다. 누엔씨는 전선장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서 만난 한옥주 간호사와 대학생 자원봉사로 나섰던 변영해씨(나중에 변형혜씨로 밝혀짐)도 꼭 찾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적십자 명예를 드높인 두 사람을 찾아 감동적인 얘기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김원기 상주적십자병원장, 정진규 관리부장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이 일을 빠른 시일 내에 추진키로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피터누엔

나는 월맹의 광민성에서 태어나 10세 때 부모를 따라 다낭에 정착하였다. 생활은 유복한 편이라 좋은 교육을 받았다. 월남에서 프랑스 고등학교를 다녀 불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하였다. 뛰어난 어학능력을 발휘하여 월남군에서 주요한 임무를 맡았었다. 베트남이 패망할 무렵 합동군사위원회의 연락장교로 근무하면서 파리협정위반사항과 포로교환업무를 담당한 전도양양한 청년장교였다. 그러나 1975년 4월 30일 월맹군 탱크가 사이공을 밀고 들어오면서 내는 굉음과 함께 나의 앞날은 무너졌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나는 월남군 근무경력 때문에 체포돼 6년 동안 정치범 재교육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큰 고초를 겪었으리라 짐작하며 사람들이 그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물어 보길래 단호히 대답했다. “다시는 재교육수용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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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누엔 부부

6년 후 수용소를 나왔을 때, 우리 집은 이미 공산당 간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생존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아내 낸시가 아파도 약을 구할 수 없어 산으로 다니며 약초를 구해 치료해야만 했다. 살기 위해 변장을 해야 했다. 힘겹게 구한 교사자격증으로 다른 지역에서 농사와 가르치는 것을 병행하였지만 모든 상황이 점점 악화돼갔다. 어느 날 밤 달빛 아래에서 아내 낸시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베트남을 떠나야 한다고. 가족이 함께 가기에는 너무 험난한 길이라서 홀로 떠났다가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6년을 기다렸는데 이제 또 떠나가야 한다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숨을 죽여 섧디 섧게 울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희망이 없고 미래도 없는 세상에서 어찌 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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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누엔과 전제용 선장 부부

탈출

1985년 11월 10일 밤, 붕타우 인근 해안의 칠흑같은 어둠 속에 갓난아기를 포함하여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다. 여기에는 미군부대 군속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가버린 부모를 찾는 12-13세 가량의 남매도 있었다. 그들은 배가 나타나기를 초초하게 기다렸다. 목선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두들 경악했다. 조그만 통통배였기 때문이었다. 이 배로 파도 험난한 동지나해를 건너야 한다니.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불안감이 일행을 휘감았다. 그들의 불안감은 나중에 현실로 드러났다. 나흘을 항해한 뒤, 낡은 목선의 엔진은 고장 났고 펌프도 가동할 수 없어 침몰 일보 직전이었다. 20여 척의 배들이 그들을 그냥 지나갔다. 공포와 절망감으로 보트 피플들은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여 누엔씨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진정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그때 전제용 선장(65세, 경남 통영군, 멍게양식업)이 몰던 참치잡이 원양어선 광명 87호가 그 배를 발견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

종전 후 10년이 지났지만 배로 베트남을 탈출하는 난민들이 계속 늘어났다. 처음에는 난민을 수용해 주던 각국의 나라들이 밀려드는 난민들로 몸살을 앓으면서 난민 수용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보트 난민들을 구조해 주지 말라는 묵시적인 지시가 각 국 선원들에게 내려왔다. 적어도 한국 선원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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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구조된 해역을 가르키고 있다.


전제용 선장

나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는 낡은 목선을 보고 국제 정세를 잠시 떠올렸다. 또 민주화되기 전의 국내 상황도 살폈다. “그냥 지나치면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러나 데리고 가면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생계가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선원들과 난상토론을 벌였다. 처음에는 많은 선원들이 반대하였지만 “내 부모 형제라고 생각해 봐라.”는 나의 말에 선원들은 보트 난민들을 구조해 주기 위해 모두들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나는 무인도에 내려주라는 본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그들을 데리고 부산항에 들어왔다. 난민들은 부산수영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수용되었고 나는 선원들과 함께 관계 기관에 불려 다니며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슬 푸른 수사관들이 조사를 마치며 나에게 구조를 잘했다고 말했을 때 우리 민족의 심성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관계 기관의 지시에 따라 난민들이 수용돼 있는 1년 6개월 동안 한번도 수용소를 방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용소를 찾는 선원 편으로 선물은 간혹 보냈다. 나는 이어 바로 하선조치를 당했다. 만 45세, 한창 일할 나이에 해고를 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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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용소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


수영적십자수용소, 한옥주 간호사, 변형혜 봉사자

누엔씨의 말 “수영적십자수용소 시절, 적십자의 좋은 점을 체험하였다. 그전에는 적십자를 피상적으로 알았다. 적십자봉사원들과 직원들은 우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주었다. 허영자, 김봉순 봉사원(아직도 부산지사에서 봉사원으로 일하고 계셔서 반가운 해후를 했다.)은 객지에서 몸이 아프면 큰일 난다고 항상 더 먹으라고 무엇이든 듬뿍 퍼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눈빛과 손짓 발짓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번에 적십자 총재님을 만나고 적십자 여러 기관을 방문한다고 하여 연설문과 감사패를 전달하려고 며칠 밤을 새우며 준비하였다. 대한적십자사 한완상 총재를 만나 감사패를 전달하고 연설까지 하다니 내 일생 일대의 영광이다.”



한옥주 간호사의 말 “나는 당시 부산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다 병원이 매각되는 바람에 부산지사로 옮겨 근무하였다. 보트 피플이 수영적십자수용소에 들어오자 그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누엔씨는 성직자 같았다. 조그만 수첩을 구해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였다. 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다. 나는 힘이 들면 가족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잘 해 주려고 하였다. 거창하게 적십자인도주의 이념을 들먹일 나이도 아니었다. 다소 수용소 규정에 어긋나도 그들이 편하도록 해 주었다. 그들과 함께 병원에 갔다 오다 수영시장에서 순대와 떡볶이를 사먹던 기억이 새롭다. 누엔씨가 나를 통해 적십자이념을 배웠다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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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적십자사 환영


변형혜 자원봉사자의 말 “부산대학교 2학년 이었던 나는 적십자봉사원으로 수영적십자수용소에서 통역업무를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영어를 실습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난민들의 실상을 보니 허투로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았다. 난민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친 일도 그것의 하나였다. 그들에게 제대로 해 준일도 없는데 나를 찾았다고 하니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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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적십자사 환영식장에서


누엔씨의 세 가지 소망

나는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세 가지 소망을 세웠다. 첫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 베트남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선장을 찾는 일 그리고 베트남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 오는 것이었다. 나는 피자배달, 세차 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생명을 선물 받았기에 나도 남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1등으로 졸업하면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 연설을 하였다. 열심히 일하여 첫 번째와 세 번째 목표를 이루었다. 전선장 찾는 일은 어려웠다. 부인과 함께 성당에 나가 전선장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이 일을 얘기하면서 전선장을 찾아 달라고 매달렸다. 내가 근무하는 페어뷰 주립병원의 동료 직원인 김순자 간호사에게도 전선장 얘기를 하였다.



김순자 간호사, 그리고 지성이면 감천

누엔씨는 병원에서 워낙 성실하여 환자와 직원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다. 성당에 다녀서 그런지 가톨릭사제처럼 산다. 그런 분이 나에게 구조받은 얘기를 하면서 전선장을 찾아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해 왔다. 내가 한국을 다니러 간다고 하니 전선장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한국은 좁은 곳 같지만 한 사람을 찾기에는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세월은 흘렀다. 의외의 곳에서 길이 뚫렸다. 제부인 정청씨가 서울 수협본사에 근무하는데 자기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자료를 달라고 했다. 관련 부서에 가서 산더미 같은 자료를 뒤지며 마침내 전선장의 연락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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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적십자사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


17년만의 소식, 해후 그리고 화해

구조 후, 17년이 지난 2002년 5월 초, 전선장은 한 재미교포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당신이 구조해 준 난민 대표인 누엔씨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연락이 꾸준히 이어지다가 2004년 8월 전선장은 누엔씨의 초청을 받아 LA를 방문하였다. LA의 베트남 커뮤니티인 리틀 사이공의 최대 일간지 ‘누이 비엣’지가 전선장과 누엔씨의 얘기를 대서특필하였다. 이 아름다운 미담이 보도되자 전선장은 미국 내에서 영웅이 되었다. 전선장이 방문하기 전까지 베트남 커뮤니티와 한인 커뮤니티는 왕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전선장 방문을 계기로 두 커뮤니티는 밀월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국 주류 및 베트남, 한인 사회로부터 전선장은 영웅대접을 받았다. 미 하원의원 에드 로이스 의원은 전선장을 ‘UN난센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권태일 수사지원팀장과 하춘도

필자는 한옥주씨와 변영해씨를 찾아 주기로 했다. 부산지사에 물어보았으나 한옥주씨는 오래 전에 그만두었다며 주민등록번호만 알려 주었다. 몇 달이 흘러갔다. 간혹 부산지사로 전화하여 한옥주씨의 소재를 알 만한 사람을 수소문해보았으나 거의 20여 년 전이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영남일보 2005년 7월 6일자에 게재된 기사를 봤다. 대구서부경찰서의 권태일 경위가 미국 시애틀로 입양된 쌍둥이 자매의 국내 가족을 찾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권경위는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이산가족들을 찾아 줘 사람 찾아 주는 경찰로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권태일 수사지원팀장의 말 “하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우선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한옥주씨를 찾았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친정집에 전화하니 중국에 거주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으로 전화를 하여 이 사연을 얘기하니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11월 초에 친정아버지 기일에 입국한 한옥주씨를 만나 당시의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변영해(나중에 변형혜씨로 밝혀짐) 씨는 찾기 어려웠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동안 내가 사람을 찾으며 얻은 노하우로 검색하니 변형혜로 나왔고 친정집에 전화를 하니 현재 네덜란드 대학에서 근무한다고 하여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피터누엔씨의 한국 일정

누엔씨는 9월 7일 입국하여 인천에서 1박을 하였다. 다음 날 누엔씨 부부와 전선장 부부는 상주적십자병원을 방문하고 이 얘기를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준 김원기 원장에게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대구서부경찰서를 방문하고 이현희 서장에게 두 사람을 찾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였다. 권팀장의 방을 방문하고 두 사람을 찾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부산지사를 방문하여 김영환회장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부산지사의 저력을 알 수 있는 것 하나. 어느새 구했는지 베트남어로 된 현수막을 만들어 게시하였다. 당시 적십자수용소에서 근무하였던 허영자, 김봉순봉사원을 찾아 인터뷰식장에 데려와 누엔씨가 추억을 회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해운대 구청을 방문하여 당시 관계자로부터 수용소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수용소를 방문하였다.


상전벽해. 수용소는 사라지고 사람도 흩어졌으나 주위를 흐르는 수영천과 멀리 바라다 보이는 장산은 반가웠다. 1-2백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했음을 아는 이 없다. 서울지사를 방문, 정귀옥 사무국장으로부터 봉사업무에 대해 얘기를 듣고 봉사 활동 중인 봉사원들과 함께 환담을 나눴다.


한완상 총재 예방

필자는 누엔씨가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하여 고마움의 뜻으로 감사패를 전달하고 싶다는 얘기를 한완상총재께 전해드렸다. 한총재께서는 기꺼이 누엔씨를 환영한다고 하며 언제라도 방문하라고 하셨다. 누엔씨는 이 얘기를 듣고 며칠 밤을 새며 연설문을 작성하였다. 한완상 총재를 방문하던 날 누엔씨 부부, 전제용선장부부, 한옥주님, 권태일 팀장과 필자가 대한적십자사에 모였다. 누엔씨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감사패를 전달하고 연설문을 읽었다. 한총재께서 거의 1시간을 할애하여 누엔씨와 전선장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는데 전선장에게는 국위선양과 생명을 구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 누엔씨에게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 아름다운 정신의 소유자라고 칭찬하였다.


해결해야 할 두가지

전선장은 적십자인도주의 이념을 행동으로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한 사람의 인명을 구해도 떠들썩한데 100여명을 구한 전선장의 업적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전선장을 적십자 인도주의 홍보대사로 모시면 좋지 않을까? 적십자 인도주의 이념이 전선장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이 많다. 해외입양아, 남북이산가족, 어릴 적 헤어진 가족 등을 찾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런 것을 공식적으로 찾아주는 전담 기관이 없는 실정이다. 각 기관마다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우리 적십자에서 사람 찾는 업무를 담당하면 안 될까?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일만큼 적십자와 어울리는 업무가 어디 있을까? 적십자 인도주의 이념은 가족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해코지 할 수 있을까? 사람 찾는 업무가 거대한 조직이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행자부에서 사용하는 행정전산망만 연결돼 있으면 된다. 다음은 노하우다. 공개적으로 떠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 찾는 데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 노하우를 가장 많이 축적한 사람은 권팀장이다. 권팀장의 힘을 빌면 적십자의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인연들

한총재를 배석한 임용훈 남북국제본부장이 수용소에서 난민들이 외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사지를 빠져나온 난민들을 도우기 위해 적십자직원들이 물심양면으로 힘을 합했다고. 애처러운 모습에 주머니도 몇 번이나 털었다고 했다. 임본부장은 난민들이 선택한 나라가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게 갖은 노력을 다했다. 임본부장은 비자를 받고 마지막으로 떠나는 난민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국방부대변인을 역임하였던 박종식 장군은 미국에서 누엔씨 이웃에 살았는데 누엔씨와 우연히 얘기하다 누엔씨가 수용소에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박장군은 국방일보 편집장을 역임하였던 이재원씨가 수용소에 있던 누엔씨와 함께 베트남 패망 당시의 얘기를 적은 책을 발간하였던 것을 기억했다. 누엔씨는 박장군과 이재원씨도 난민들을 도와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했다. 박장군과 이재원씨는 누엔씨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를 보살펴주기 위해 상당히 많은 애를 써 주었다.

한완상 총재 예방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전제용 선장, 네번째 피터누엔, 다섯번째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왼쪽에서 세번째 권태일 팀장, 네번째 한옥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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